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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산'은 무명 래퍼 학수가 짝사랑했던 선미의 꼼수에 낚여 흑역사 가득한 고향 변산에 강제 소환되며 벌어지는 유쾌하고 뭉클한 휴먼 드라마입니다. 이준익 감독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가장 피하고 싶었던 과거'와 마주하는 청춘의 성장을 그려냈습니다. 주연 배우 박정민은 이 작품을 위해 직접 랩 가사를 쓰고 무대를 소화하는 열연을 펼쳤으며, 김고은은 정겨운 사투리와 현실감 넘치는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습니다. 촌스럽지만 진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 '변산'의 줄거리와 주요 관전 포인트, 그리고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심층적으로 리뷰해 보겠습니다.

1. 랩이 된 방백: 서울의 고독과 고향 변산의 흑역사가 만나다
영화 '변산'은 서울에서 고시원 생활을 하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무명 래퍼 '학수(박정민 분)'의 고단한 삶에서 시작됩니다. 쇼미더머니 예선에서 매번 고배를 마시던 그는 고향 친구 선미(김고은 분)의 전화를 받고 아버지의 병환 소식에 어쩔 수 없이 변산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학수에게 변산은 지독히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서린,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흑역사'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학수가 고향에 머물며 과거의 인물들과 재회하는 과정을 통해, 그가 랩 가사 속에 숨겨두었던 진짜 이야기들을 밖으로 끄집어내게 만듭니다.
이 작품에서 랩은 단순히 음악적 장치가 아니라 학수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방백' 역할을 합니다. 세련된 비트 위에 얹어진 투박한 진심은 그가 세상을 향해 내뱉는 외침이자 자기 고백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그를 래퍼가 아닌 '심빡기(학수의 본명)'로 부르며 그의 자존심을 긁어대지만, 역설적으로 그 촌스러운 참견들이 학수가 단단히 걸어 잠갔던 마음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됩니다. 이준익 감독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부자간의 갈등과 청춘의 방황을 특유의 해학적 연출로 풀어내며, 비릿한 바다 내음과 함께 삶의 비애를 웃음으로 승화시킵니다. 변산이라는 좁은 공간 속에서 얽히고설킨 관계들이 풀려가는 과정은 관객들에게 자신의 과거와 화해할 용기를 건넵니다.
2. 박정민의 진정성과 김고은의 단단함: 연기파 배우들의 빛나는 하모니
배우 박정민은 이 영화를 위해 약 1년 동안 랩 연습에 매진했을 뿐만 아니라, 극 중 사용된 모든 곡의 가사를 직접 쓰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래퍼 '심뻑'으로서의 카리스마와 지우고 싶은 과거 앞에서 작아지는 '학수'의 찌질함을 자유자재로 오갑니다. 무대 위에서 쏟아내는 그의 랩은 기성 가수 못지않은 전달력을 갖췄으며, 그 가사 하나하나에 인물의 서사가 녹아 있어 뭉클한 감동을 줍니다. 박정민이라는 배우가 가진 성실함이 학수라는 캐릭터에 진정성을 부여했고, 이는 관객들이 학수의 치기 어린 행동조차 응원하게 만드는 힘이 되었습니다.
학수를 고향으로 끌어들인 장본인 '선미' 역의 김고은은 극의 무게중심을 완벽하게 잡아줍니다. 그녀는 역할을 위해 체중을 증량하고 전라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며, 겉은 무심한 듯 보여도 누구보다 학수를 깊이 이해하는 속 깊은 친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김고은의 연기는 화려하지 않지만, 담백하고 단단한 울림이 있습니다. 특히 학수에게 던지는 뼈 때리는 충고들은 영화의 핵심 주제를 관통하며 극의 흐름을 바꿉니다. 두 배우가 논두렁에서, 혹은 바닷가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꾸며진 영화적 대사가 아닌 실제 고향 친구들의 대화처럼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주연진뿐만 아니라 학수의 아버지 역을 맡은 장항선과 동네 친구들로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은 '변산'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생동감 넘치는 현실로 탈바꿈시켰습니다.
3. 내 고향은 폐항, 가난해도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변산'이 전하는 가장 아름다운 메시지는 "값지게 살지는 못해도 촌스럽게 살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학수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고향을 부끄러워했지만, 결국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변산의 붉은 노을이었습니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라는 시 구절처럼, 영화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역설합니다. 화려한 서울의 조명보다 따뜻하게 온몸을 감싸는 노을 아래에서 학수는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됩니다.
"가장 아픈 곳을 똑바로 쳐다봐야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다. 도망치는 건 해결책이 아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갯벌 싸움 장면은 이러한 갈등의 해소 과정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여 보여줍니다. 온몸에 진흙을 묻히며 뒤엉켜 싸우는 모습은 그동안 쌓아온 응어리를 씻어내는 일종의 제의와도 같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청춘들에게 '완벽한 성공'이 아니라 '자기 수용'이라는 더 큰 선물을 건넵니다. 비록 돈도 없고 백도 없는 무명 래퍼일지라도, 자신의 뿌리를 인정하고 당당하게 서 있을 때 비로소 진짜 자신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결말은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변산'은 지친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은 우리 모두에게, 당신이 버리고 온 그 자리에 사실은 가장 소중한 구원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수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