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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상담실을 찾는 부모님들이 사춘기 자녀에 대해 가장 답답해하는 부분입니다. 물어보면 "몰라요"로 일관하거나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아이 앞에서, 말로 하는 상담은 벽에 부딪히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청소년기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치는데 이를 언어로 표현할 어휘력과 전두엽 기능은 아직 미성숙한 상태입니다. 이때 억지로 말을 시키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우회로가 있습니다. 바로 '미술 치료''놀이(모래) 치료'입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20년 임상 경험을 통해 확인한 비언어적 치료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백 마디 말보다 강력한 그림 한 장, 모래 상자 속의 세계가 어떻게 아이의 닫힌 마음을 여는지 그 치유의 원리를 소개해 드립니다.

말로 표현 못 하는 상처를 치유하는 미술·놀이 치료의 효과


1. 왜 말이 아닌 '예술'인가? : 방어기제 무력화

사춘기 아이들은 상담실에 들어오면 잔뜩 긴장하며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세웁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어른들은 판단할 거야"라는 불신 때문입니다. 언어는 의식적으로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거나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미술이나 놀이는 다릅니다. 그림을 그리고, 점토를 주무르고, 피규어를 고르는 과정은 우뇌(감정 뇌)를 자극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의 의식적인 검열이 느슨해지고, 무의식 속에 숨겨둔 불안, 공포, 분노가 자연스럽게 '투사(Projection)'되어 나옵니다. 아이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의 빗장이 풀리는 것입니다.

2. 미술 치료: 그림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

"우리 애는 그림을 못 그리는데 괜찮을까요?"라고 걱정하시지만, 미술 치료는 미술 학원이 아닙니다. 잘 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 감정의 배설 (Catharsis): 말로 "화가 나요"라고 하는 것보다, 빨간색 크레파스로 도화지가 찢어질 듯 칠하거나 찰흙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행위가 훨씬 강력한 감정 해소 효과를 줍니다.
  • 자아의 시각화: 빗속의 사람 그리기(PITR)나 집-나무-사람(HTP) 검사 등을 통해 아이는 자신의 현재 스트레스 상태와 가족 관계에서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말로는 "괜찮아요"라고 했지만, 그림 속의 자신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의 아픔을 자각하게 됩니다.

3. 놀이(모래) 치료: 다 큰 애가 인형 놀이를?

청소년에게 무슨 놀이 치료냐고 반문하실 수 있지만, 청소년기에는 주로 '모래놀이 치료(Sandplay Therapy)'가 활용됩니다. 규격화된 모래 상자 안에 수백 가지의 피규어(사람, 동물, 건물, 괴물 등)를 배치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꾸미는 것입니다.

이 치료의 핵심은 '통제감 회복'입니다. 현실에서는 성적, 부모님, 친구 관계 등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무력한 아이지만, 모래 상자 안에서만큼은 자신이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됩니다. 맹수를 가두기도 하고, 영웅이 되어 싸우기도 하면서 아이는 현실에서 잃어버린 자신감과 문제 해결 능력을 시뮬레이션하고 회복합니다.

4. 부모님이 지켜야 할 원칙: 해석하려 들지 마세요

아이가 치료 시간에 만든 작품이나 그림을 집에 가져왔을 때, 부모님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바로 '탐정 놀이'입니다.

"이 검은색은 아빠니?", "왜 사람 표정이 울고 있어?"
이런 질문은 아이에게 또 다른 심문으로 느껴집니다.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은 치료사의 몫입니다. 부모님은 그저 "네가 열심히 만들었구나", "색감이 참 강렬하네" 정도로 있는 그대로를 봐주시고 인정해 주시면 충분합니다.


결론: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치유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이 크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술 치료와 놀이 치료는 상처받은 아이의 영혼에 놓아주는 '가장 안전한 다리'입니다. 아이가 말로 하기 힘들어한다면, 억지로 입을 열게 하는 대신 크레파스와 모래 상자를 선물해 보세요. 그 안에서 아이는 비로소 자유롭게 소리치고, 울고, 치유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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